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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조대왕과 정순왕후

by 淸安 * 2008. 3. 20.

 ★ 이산 : 정조대왕 ★

1752~1800. 조선의 제22대 왕.이름 산. 자 형운(亨運). 호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惠嬪)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 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59년(영조 35) 세손(世孫)에 책봉되고, 1762년 세자인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뒤 동궁으로 불렸으며,
1764년 2월 어려서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 뒤의 眞宗)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1775년 11월 영조가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홍인한(洪麟漢)이 "동궁은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를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내세우며 반대했으나, 그해 12월 대리청정의 명을 받았고,
1776년 3월 영조가 죽자 대보(大寶)를 세손에게 전하라는 유교(遺敎)에 따라 즉위했다.
 
왕위에 오르자 바로 효장세자를 진종대왕으로,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했으며,
세손 때부터 그를 보호한 홍국영(洪國榮)을 도승지로 삼고 숙위대장(宿衛大將)을 겸직시켜 반대세력을 숙청해
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사주한 숙의 문씨(淑儀文氏)의 작호를 삭탈하고,
화완옹주(和緩翁主)는 사가(私家)로 방축했으며, 문성국(文聖國)은 노비로 만들고,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과 홍인한을 경원과 여산으로 귀양보냈다가 사사(賜死)했다.
나중에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며 권력을 남용하자 조신들의 탄핵에 따라 1779년 9월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듬해 2월에는 전리(田里)로 돌려보내 친정체제를 강화했다.

 
규장각 설치와 문운의 융성
정조는 즉위한 다음날 어제봉안(御製奉安)의 장소로 마련했던 규장각(奎章閣)을 9월에 준공, 역대 왕의 문적들을 수집해 보관하게 하고, 중국에서 보내온 서적을 비롯한 많은 책들을 거두어 수장하게 했다.
1777년 12월 교서관(校書館)을 규장외각(奎章外閣)이라 하고, 1782년 2월 강화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신축했다.
규장각에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 등을 각신(閣臣)으로 선발해 후한 녹봉을 주고 연구에 몰두하도록 했으며,
정조 자신도 이들과 밤을 새워 대화를 나누고 시정(時政)의 득실과 학문을 논했다.
각신의 양성은 당파의 인물을 멀리하고 참신하고 유능한 신진들을 길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이었다.
1779년에는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
서얼 출신으로 재주있는 인사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했다.
정조는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활자에 깊은 관심을 갖고 1772년 임진자(壬辰字), 1777년 정유자(丁酉字), 1782년 한구자(韓構字), 1792년 목활자인 생생자(生生字), 1795년 구리로 정리자(整理字), 1797년 쇠로 춘추관자(春秋館字) 등 도합 80여 만 자를 만들어 규장각에 비치해 서적 간행에 이용하도록 했다. 금원(禁苑) 안에는 규장각의 부설기관으로 봉모당(奉謨堂)·열고관(閱古觀)·개유와(皆有窩)·서고(西庫)·이안각(移安閣) 등을 두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활발한 서적편찬 작업이 이루어져 1781년 〈어정성학집략 御定聖學輯略〉·〈어정팔자백선 御定八子百選〉, 규장각 소장 3만 여 권의 분류목록인 〈규장총목 奎章總目〉, 1782년 〈동국문헌비고〉를 증보한 〈증보동국문헌비고〉(146권), 〈국조보감 國朝寶鑑〉, 1784년 〈규장각지 奎章閣志〉·〈홍문관지 弘文館志〉, 1785년 〈대전통편〉·〈태학지 太學志〉, 1786년 〈갱장록 羹墻錄〉, 1787년 〈문원보불 文苑黼黻〉·〈어제춘저록 御製春邸錄〉·〈전율통보 典律通補〉, 1788년 〈동문휘고 同文彙考〉, 1789년 〈해동읍지 海東邑誌〉, 1790년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 1794년 〈주서백선 朱書百選〉, 1796년 〈규장전운 奎章全韻〉·〈어정사기영선 御定史記英選〉, 1797년 〈오륜행실 五倫行實〉, 1798년 〈오경백편 五經百編〉, 1799년 정조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 弘齋全書〉 등이 편찬·간행되었다.

 
탕평책의 실시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실시했다.
아버지 장헌세자가 당쟁으로 희생되고 자신도 당쟁의 직접적 피해를 입음으로써 당쟁의 폐해를 절감하고,
자기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이름하는 등 당색에 구애되지 않고 인물 본위로 관리를 등용하려 했다.
정조의 탕평은 준론(峻論)의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이었다.
영조대의 탕평책인 완론탕평(緩論蕩平)은 척신과 권력을 장악한 간신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남을 억누르는 방편이 되었으며, 왕권에만 영합하여 권력유지에 부심하여 '세상에서는 탕평당이 옛날의 붕당보다도 심하다고 하는 말이 퍼지는' 정도가 되었다고 인식하고, 초기부터 홍국영·유언호(兪彦鎬)·김종수(金種秀) 등 노론 중에서 청론(淸論)을 표방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실시했다. 준론탕평은 완론탕평과는 달리 충역(忠逆)·시비(是非)·의리(義理)를 분명히 하는 탕평으로서, 임금의 은혜를 강조하고 각 당에서 군자를 뽑아서 쓰는 '붕당을 없애되 명절(名節)을 숭상한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영조대의 탕평이 세가대족(世家大族)의 화합에 우선하고 사대부의 화합에는 소극적이었던 데 대한 반성에서 의리의 탕평을 주장하고, 산림(山林)·궁중 세력과의 연결을 끊음으로써 청명(淸名)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즉위초 김귀주(金龜柱)와 홍인한의 외척당을 와해시켰으며, 홍국영도 제거했다.
1788년에는 남인 채제공(蔡濟恭)을 정승으로 등용하여 노론과 균형을 이루게 했다.
정조의 준론탕평은 결국 사림세력에 의한 공론정치의 방향보다는 관료제의 정점이 되는 재상권의 강화를 통한 사림정치 이념의 실현이라는 방향에서 왕권강화를 지향했다. 탕평의 강화를 위해 문풍(文風) 진작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규장각은 이제까지의 여러 관각(館閣)들의 기능을 병합(倂合)하여 권력을 일원화하려는 시도에서 만들어졌으며, 이를 통해 사기(士氣)·명절을 존중하는 청론을 강조함으로써 준론탕평을 달성할 수 있는 청류(淸流)의 인재를 키우겠다는 또 하나의 청요직(淸要職)으로서 기능했으며, 초계문신(抄啓文臣)은 새로운 인재양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개혁정치의 지향
정치체제를 정비하면서 정조가 의도했던 개혁은 1777년 반포된 대고(大誥)에
"민산(民産)을 만든다,
인재를 무성하게 한다,
군사를 다스린다,
재정을 풍족하게 한다"는 4개 항목으로 집약되어 있다.
민산의 문제는 경계(經界)에서 시작한다고 하여 근본적인 개혁을 전제(田制)의 개혁으로 파악하고,
조선 초기의 제도였던 직전법(職田法)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이는 정조 치세 동안에 실시되지는 못했다.
상공업은 말업(末業)으로 파악했으나,
농민의 이농현상에 따른 도시 소상인의 증가에 대해서는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실시함으로써 해결을 기도했다.
군사문제는 군문(軍門)의 혼란을 지적하여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고, 이를 점차 확대하여 모든 군문의 기능을 병합, 장악하려는 시도를 했다.
 재정의 문제는 축적에서 시작한다고 보고, 전통적인 주자학자들의 주장인 절약과 검소는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라고 보았다.
재화를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서 생산력 발달을 강조하는 북학파를 중시하고, 응지진농서(應旨進農書)를 받는 등 농업생산력 발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재정확립을 위한 기초 조사로서 중앙 각 관서와 군영의 보유양곡수를 조사한 〈곡부합록 穀簿合錄〉, 전국에 걸친 환곡의 현황을 조사한 〈곡총편고 穀總便攷〉, 전세 징수의 기본상황을 파악한 〈탁지전부고 度支田賦考〉 등을 간행했으나, 구체적 방안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밖에 1776년 궁방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세금을 거두던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금지했다.
1777년 서얼들의 허통요청으로 〈서류허통절목 庶類許通節目〉을 정했다.
1778년 가혹한 형벌을 완화하기 위해 형구(刑具)의 규격과 품제를 정한 〈흠휼전칙 欽恤典則〉을 발포하고, 도망노비를 추쇄(推刷)하는 노비추쇄법을 폐지했다.
1782년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1777년을 기점으로 100년간의 역(曆)을 미리 계산하여 〈천세력 千歲曆〉을 편찬·간행했다. 1783년에는 〈자휼전칙 字恤典則〉을 반포하여 흉년에 버려지거나 굶주린 아이들을 구하는 법을 정했다.
재위중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확산되어 사회문제가 되었으나, 서학의 발흥은 정학(正學)인 주자학이 융성하면 저절로 없어질 것으로 보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그리하여 1791년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신주를 불지르고 제사를 폐지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났으나, 천주교 박해를 주장하는 다수의 의견을 물리치고 두 사람만을 처형함으로써 사건을 더이상 확대하지 않았다.
또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장헌세자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그 묘를 영우원(永祐園)이라 했으며, 묘호(廟號)를 경모궁(景慕宮)이라 하고, 1789년 18만 냥을 들여 경기도 양주에 있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 이듬해 용주사(龍珠寺)를 개수·확장해 장헌세자의 명복을 빌게 했다.
1800년 6월 개혁의 의지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갑자기 죽은 뒤,
유언에 따라 현륭원 동쪽 언덕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1821년 효의왕후가 죽자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옮겨 합장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아래 건릉 사진은 아침이슬님 사진 입니다

 

 

★ 정순왕후 ★

       (왕비열전에서 발췌) 

정권을 둘러싼 외척간에 싸움〓김씨 가문 대 홍씨 가문
영조는 정실 왕비 두 명과 후궁 넷을 두었다.

왕비는 정성왕후 달성 서씨이며,

서씨가 죽은 후 들어온 두 번째 왕후가 정순왕후 경주 김씨이다.

정성왕후 서씨는 1692年12月7日 아버지 서종제와 어머니 우봉 이씨와의 사이에 오늘날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던 사저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이 되던 1704年 서씨는 연잉군 금(英祖)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에 봉해졌는데, 그때 영조의 나이 열한 살이었다.

서씨의 아버지 서석제는 조선초기 뛰어난 학자인 자손으로 사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서씨는 혼인한 후 왕위에 뜻이 있던 영조와 동거동락한사실상의 동지였다.

경종 시절 서씨의 조카 서덕수가 노론인 영인군을 국왕으로 추대했음을 전하고 또 이 때문에 사형 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서씨의 친정은 영조를 즉위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영조는 드디어 경종4년 소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하지만,

불행히도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영조는 결국 세명의 후궁들에게서 2남7여를 낳았는데

제1후궁인 정빈 이씨가 효정세자와 두 명의 옹주를,

제2후궁인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와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순옹주를

제3후궁인 귀인 조씨가 화유공주를,

마지막 후궁인 숙의 문씨가 화령옹주와 화길옹주 등을 낳았다.

일곱 명의 딸 중 맏딸은 유아기 때 사망했고, 둘째딸 화순옹주는 남편 월성위가 죽자 그 뒤를 따라 굶어 죽었다.
다섯째 딸 화협옹주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첫아들인 효장세자도 영조가 즉위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열 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 다음 왕세자로 책봉된 왕자가 둘째 아들 사도세자였다.

서씨는 후궁들의 몸에서 난 소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애지중지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사도세자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쏟으며 돌보았다.

그러기에 만일 서씨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일은 면했을 지도 모른다

1757년 2월 15일 서씨는 예순여섯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오늘날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용두리에 있는 서오릉의 홍릉에 홀로 안장되어 있다.


정순 왕후 김씨는

1745년 11월 10일 서산 골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이 되던 1759년 6월에 영조와 혼인하여 두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때 영조의 나이 예순 여섯이었다. 임금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처녀만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법이라,

열다섯 꽃다운 처녀가 노인에게 시집을 오게 된 것이다.

김씨가 영조에게 시집왔을 때 조정은 소론에 동정적인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이에 잔뜩 긴장한 노론 측은 영조의 계비로 들어온 정순 왕후 김씨를 중심으로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서 아사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도세자가 죽은 후 홍봉한이 영조의 신임을 얻어 중책을 받자 정순 왕후 김씨 집안에서 긴장하였다.

풍산 홍씨 집안과 경주 김씨 집안은 사도세자를 제거할 때는 같은 노론의 입장에서 함께 일을 추진했으나,

막상 이권 다툼이 발생하자 정적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하여 노론 대 소론으로 벌어지던 당쟁이 홍씨 집안 대 김씨 집안 즉 외척간의 싸움으로 바뀌었다.

정순 왕후 김씨와 그의 동생 김귀주는 세손 정조가 즉위하면 김씨 집안 몰락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양자를 들여 김씨 집안의 정권을 강화하고 홍봉한을 정계에서 실각시켜려 하였다.

그리하여 김귀주는 1790년 한유를 사주해 “홍봉한이 세손 정조를 제거하고 대신 은언군 인을 추대하려 한다”는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이 사건에 연루된 홍봉한은 청주로 귀양갔고,

그 후 홍봉한을 회유하려던 세손이 영조에게 이를 모함이라고 아뢰어 귀양에서 풀려났던 일도 있었다.


숨죽이며 때를 기다리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후겸, 홍인한, 숙의 문씨, 문씨의 동생 문성국 등 사건의 관련자들을 문초하여 귀양 보낸 후,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을 제외하고 모두 사사시켰다.

정순 왕후 김씨의 동생 김귀주도 예외 없이 귀양에 처해졌다.
정순 왕후는 비록 대비였으나 정조가 이미 성인이었으므로 대리 청정할 수도 없어

혜경궁 홍씨처럼 단식 등의 방법으로 항의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준 홍국영을 도승지겸 금위대장에 임명하여 개혁 정치를
전개해나갔다. 그리고 당색에 물들지 않은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문신을 양성하는 규장각과
무신을 양성하는 장용영을 설치했다. 정조는 이 두 기관을 이용하여 왕권 강화를 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정권에서 소외당한 영남 남인들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끌어들였다.
그런데 정조에게는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정비인 효의 왕후 김씨에게서 후사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1753년 12월 13일 서울 가회방에서 태어난 김씨는 열 살 때인 1762년 세자빈에 간택되었고,

14년후 정조가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아버지 김시묵은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 청풍부원군의 후손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홍상언의 딸이다. 영조는 현종 대에 김씨 집안에서 왕통을 이어준 연유로 김씨를 간택했다고 한다.
영조는 손부 김씨를 맞아들이고는 다음과 같은 글을 친히 써서 하사하기도 했다.
“오세(대) 후에 옛날을 이으니 이제야 종사가 튼튼해지는구려(五世繼石시寔爲宗國)”


손부에 대한 영조의 기대는 자못 컸다. 그러나 김씨는 정조와 금실은 좋았지만 몇 년이 가도 태기가 없었다.

14년이 넘도록 정조가 후사를 보지 못하자 조정과 왕실에서는 후궁을 들일 것을 요구했다.

영조의 3년상이 끝나고 부묘도 끝난 1778년 5월, 대왕대비 김씨는 후궁을 들이라는 한글교지를 내린 것이다.

이때 정무를 도맡아 처리하던 홍국영이 누이 홍씨를 왕실에 넣었으니, 바로 원빈 홍씨였다.

그러나 홍씨는 1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음으로 들어온 후궁이 판관 윤창윤의 딸 화빈 윤씨였다.
정조는 아들을 보기 위해 회빈 윤씨의 처소를 자주 드나들었으나 역시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정조는 공교롭게도 윤씨의 시중을 드는 나인에게 마음이 끌렸다.

곧 창녕 성씨였다. 정조6년(서기1782년)9월7일 드디어 성씨의 몸에서 왕자가 탄생했다.
정조는 이를 기념하는 別試를 실시하기도 했는데, 이때 무과에 2천6백 명이나 합격시켰다고 한다. 그 정도로 기다리던 왕자였다.

그리하여 성씨에게는 소용의 내명부 직첩을 내려주고 얼마 후 의빈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세살 때 세자로 책봉된 문효 세자는 다섯 살 때 요절하고 말았다.

아들을 잃은 성씨는 상심한 탓에 몸져누웠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후사가 없는 왕실의 분위기는 더욱 침울해졌고 또다시 후사를 위해 주부 박주원의 딸 박씨를 후궁으로 맞아 수빈으로 봉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나 왕비 김씨는 앉은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시조부 영조가 친히 글까지 써서 하사하였는데 아들은커녕 딸조차도 낳지 못하는 자신이 죄인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는 헛구역질을 하는 등 임신한 것 같은 생리현상 들이 나타났다.
왕실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하여 떠들썩하였고 배가 점점 불러오자 조정에서는 산실 청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열 달이 지나도 아기가 나오기는커녕 출산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한 해가 지났건만 그대로였다. 아기를 낳아야 갰다는 일념이 너무 과하여 상상임신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해프닝이 벌어진 지 얼마 후 수빈 박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 왕자가 정조의 뒤를 잇는 순조다.
정조는 뒤를 이을 후사를 보자 온 천하를 다 얻은 기분이었다.

이제 국정에만 전념하면 되었다. 집권여당인 노론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영남 남인과도 손을 잡았고,

규장각을 통해 신선한 인재들도 속속 배출되었다.

그 인재들은 사대 관에서 벗어나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부국강병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진 실학자들이었다.


이제 조정 안팎은 서서히 당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치가 채 정착되기도 전에 정조는 순조를 왕세자로,

노론 시파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책봉한 해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정조의 죽음과 함께 새로운 사상을 펼치려던 실학자들의 이상도 한풀 꺾이고 말았다.


정순왕후의 천주교 탄압과 정권장악
1801년 1월 10일 용상 아래에는 모든 문무백관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고,

용상에서는 솜털도 가시지 않은 보송보송한 얼굴의 11살 난 순조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긴장된 분위기를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수렴 뒤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邪學=천주교)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夷狄(이적)과 禽獸(금수)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五家作統法(오가작통법)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統內)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統帥(통수)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을 시행하여진 명함으로써 遺種이 없도록하라 ......]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였다.

정순왕후는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시작해. 정국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사학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리는 중이었다. 이는 마치 조선의 신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순왕후 김씨와 뜻을 같이 하는 벽파가 반대당인 남인들과 일부노론 시파를 탄압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개혁군주 정조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남인들은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일부남인들은 새로운 학문이자 종교였던 서학, 즉 천주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를 信西派라한다.
그리고 정조 사후 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김씨와 손잡고 邪學(사학)을 뿌리뽑는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공격했던 노론벽파 중심의 정치세력을 공서파라 부른다. 정순왕후 김씨는 그 공서파의 가장 강력한 배후 세력이었다. 정순왕후는 왕권과 다름없는 정치세력을 행사하였다. 국왕과 똑같은 권위에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 보인 스스로도 女主:女君임을 자처할 정도였다. 

김씨는 이 요청을 일곱 번이나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김씨는 마지못한 듯 허락하고 熙政堂(희정당)에서 수렴청정의 예를 거행하였다.

이전에는 수렴청정 의식만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때부터 송나라 선인 태후와 정희왕후 윤씨의 고사를 토대로 절 목을 갖추기까지 했다.
이 절 목을 보면 임금과 똑같이 경연에 참여할 수 있으며, 청 대, 그리고 진상 물건도 임금의 예와 똑같이 시행한다고 되어 있다.
수렴청정은 임금의 직접 통치와 다를 바 없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김씨는 自派 세력인 노론 벽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그리고 노론 벽파는 정조 재위 기간 동안 개혁의지를 함께 하며 등용된 시파. 신서파, 남인 세력들을 제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첫 신호탄이 천주교, 즉 서학을 수용했기에 이를 이용하여 정계에서 제거하려 한 것이다.


천주교가 처음 소개된 것은 선조 집권기였으나 숙종 때 갑술환국 이후 출사의 길이 막인 남인들이 서학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가와 사회 조직의 개혁, 개조를 요구하며 성리학을 지배 질서로 하는 현실에 비판을 가하고 혁신을 부르짖게 되었다.

이러한 혁신 사상에 양반 계층이 아닌 다른 소외 계층도 호응하게 되어 그 세력은 점차 확대되어갔다.
초기에 새로운 학문으로 받아들여진 천주교는 점차 신앙 운동으로 바뀌게 되어,

정조7년(1783) 중국에 사신 일행으로 간 이승훈이 북경 천주교회당에서 최초의 영세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서울 남부 명례동에 최초의 천주교회가 설립되었다.
천주교는 그러나 정조 12년 효 사상과 군신 관계를 어지럽히고, 나라 전체의 기강을 무너뜨릴 수 있으므로 엄금해야 한다는 이경명의 상소를 기회로 사학(邪學)으로 규정받게 되었다.

그 후 조정 대신들의 입장은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인 신 서파와 철저하게 반대하는 공서 파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천주교를 박해하지는 않고 탄력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교세는 비교적 확대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인 신부 주문 모가 입국하여 활동할 무렵에는 전국의 신도 수가 4천여 명을 헤아릴 정도로 성장했으며,

정조 말년(1800년)에는 1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교세가 나날이 확대되어가던 천주교는

정순 왕후 김씨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박해받기 시작했다.

1801년 1월 김씨는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를 엄금, 근철 하라는 강경한 명령을 내렸다.

오가작통법은 民家 다섯 집을 한 통으로 평성하고, 그 중에서 統帥를 뽑아 사학 하는 무리를 고발하도록 한 것이다.

다섯 집 중 한 집이라도 천주교를 믿으면 모두 연대 처벌하겠다는 강력한 법이었다.

정순 왕후 김씨의 하교로 시작된 천주교 탄압에 벽파의 영의정 심환지 와 공서 파 대사간 목만 중이 앞장섰다.

그리하여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인 이가한, 권철신 등이 고문 받던 도중 옥사했으며,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등과 중국 신부 주문모도 참형 당했다.

뿐만 아니라 주문모에게 세례 받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인과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 등도 사사되었으며,

정약종 형제는 유배당했다.


이 사건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해 더욱 확대되었다.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은 주문모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박해가 시작되자 충청도 제천군 봉양 면에 배론(舟論)이라는 토기를 만드는 천주교도의 마을에 숨어 지내면서

黃沈과 함께 이 일을 중국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려 한 이 백서는 중국에 도착하기 전에 발각되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1년 동안 학살당한 교인 수가 300명에 달할 정도였다.

물론 여기는 노론 벽파를 비난하던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순 왕후 김씨는 이렇게 천주교도를 박해함으로서 1년 만에 조정을 노론 벽파로 채울 수 있었다.


그런데 순조가 즉위한 후 각처에서 대형 화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순조3년에 평양 부와 함흥 부에서 큰불이 나더니 그 해 12월 창덕궁 선정전도 크게 불탔다.

또 그 닷새 후에는 장안의 종로 거리에서 다시 큰불이 솟아 인심이 흉흉해지기까지 했다.

정순 왕후 김씨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탓으로 돌아올 것 같아 선수를 쳐 28일 수렴청정을 거둔다는 하교를 내렸다.


김씨는 내심 조정대신들이 그 명을 철회하라고 간청하기를 원했다.

즉 조정 안팎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조정대신들에게 검증 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조정에서는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조순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순 왕후 김씨의 바람은 김조순의 물밑작전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섭정을 거두고 난 지 1년 후인 1805년 1월12일 정순 왕후 김씨는,

노론 벽파 중심의 조정을 세우고 예순한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오늘날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의 원릉에 영조와 함께 합장되었다.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환갑이 훨씬 넘은 노인에게 시집간 김씨는 친정 집안을 위해 정계의 전면에 나서서 권력을 휘둘렀다.

영조가 살아 있을 때는 아버지 김한구의 당파와 뜻을 같이 하여 자신보다 열 살이나 연상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순조가 즉위한 후에는 친정 집안의 당파인 노론벽파를 위해 300명에 이르는 천주교도를 학살하였다.

김씨의 전횡은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며 개혁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던 조선의 역사를 퇴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조선의 정치가 당파 중심에서 외척 중심으로 나아가는 데 발판이 되었다.

★ 김귀주(金龜柱= 본관 경주, 1740∼1786)

사도세자에 반대한 벽파의 우두머리 여러 가지 이유로 아버지인 영조의 미움을 산 사도세자는 뒤주 안에서 죽게 되었다.

이 때 영조 편에 선쪽을 僻派(벽파), 사도세자 편에 선쪽을 時派라고 했다.

영조의 개비 정순 왕후의 친정오빠인 김귀주는 벽파로 남인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사도세자빈혜경궁 홍씨의 친정아버지 홍봉한은 시파로 북인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김귀주는 영조 39년 문과에 올라 부수찬·강원도관찰사 우승지 등의 벼슬을 지낸 뒤

정조가 왕위에 올라 세상이 바뀌자 흑산도에 이어 나주에 귀양을 가서 죽었다.

호는 可庵(가암). 호조참의 選慶(선경)의 손자. 영조의 장인 영돈녕 漢耉(한구)의 아들, 총융사 魯忠(노충)의 아버지.

정순 왕후의 오빠. 
#### 역사인물사전에서

 

 

홍국영 (洪國榮 1748∼1781(영조 24∼정조 5)) 

한미한 선비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나, 풍산 홍씨 가문의 일원으로서 혜경궁 홍씨와 먼 친족 관계이며,

일설에는 그의 어머니가 정순왕후 김씨의 집안 사람이라는 주장도 있다.

1771년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었다.

승문원 부정자로 첫 관직을 시작했으나, 정조와는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면서부터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세손을 음해하려는 노론 벽파의 음모를 막고 세손이 보위에 오르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1살 어린 정후겸, 세손의 작은 외할아버지 홍인한과 극렬한 대립을 하여 후세에 이야깃거리를 낳기도 했다.

 

세손을 보좌하던 시절 그의 행적 중 한 일화가 전한다.

영조는 생모가 무수리 최씨라는 것에 일종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중국의 고서 중 <강목>에 이와 관련되어 영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구절이 있었다.

어느 날 영조는 세손에게 어떤 책을 읽는지에 대해 물었고, 이에 세손은 무심결에 <강목>을 읽는다고 대답했다.

이에 심기가 불편해진 영조는 <강목>에 나와 있는 그 구절에 대해서 아는가에 대해 물었고,

당황한 세손은 그 구절을 가리고 읽는다고 답했다. 이에 영조는 이를 확인해 보겠다며 그 책을 가져오라 명했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홍국영이 극적으로 그 구절을 종이로 가린 다음 영조에게 올리니,

영조가 매우 흡족해 하며 세손을 칭찬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홍국영은 목숨마저 위태로운 세손을 적극적으로 보호했고,

이에 정조는 그를 매우 총애하고 아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그는 동부승지에 올랐다.

정조 즉위 초 홍상간, 홍인한 등 풍산 홍씨 일가가 정조의 침실에 자객을 들여보낸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는 이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고 세손과 자신의 경쟁자, 최대 난적이었던 홍인한, 정후겸, 심상운 등을 유배시킨 뒤

사약을 내려 죽였으며, 노론 벽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귀주를 흑산도에 위리안치 시켰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정조의 신임을 얻어 국왕의 근위대 역할을 했던 숙위소를 창설하여 그 대장이 되었으며,

이후 도승지, 이조 참판 등을 거쳐 대사헌에까지 올랐다.

 

그는 이러한 권세에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는데, 심지어 정조에게 올리는 문서를 일일이 자신이 먼저 검토 한 후

올리게 해 논란을 일으켰으며, 1778년에는 자신의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누이가 일찍 죽고 말자, 후사가 없었던 관계로 정조의 이복 형제인 은언군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히려 홍국영 자신이 역모죄를 날조해 죽게 만들었다.

이러한 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정조 즉위 후 주어진 막대한 특권에 세손을 보좌하던 시절의 초심을 잃어갔으며,

점차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세도가로 변질하고 만다.

정조는 그에게 역모죄를 범하지 않는 이상 그가 지은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780년 그는 자신의 누이가 왕비 효의왕후 김씨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생각하여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을 시도하다가 적발되어 정조에 의해 폐서인된 후 강릉에 위리안치 되는데,

혹자는 이것이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정조가 추구했던 정치와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정조는 즉위하자 마자 규장각 설치 후 독서에 몰입하는데, 재임한 직후인 1776년부터 홍국영이 실각한 1780년까지의 시기가 이와 일치하게 된다. 홍국영은 정조의 명을 받아 노론 벽파의 제거에 앞장섰으며, 왕의 문서를 선 검토하는 등 위세를 떨쳤는데,

정조가 이 시기 자신이 훗날 펼치게 될 사도세자 복원사업, 수원성 사업 등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에 대해 구상하며

이에 홍국영의 권력을 일정 기간 비대화시켜 그러한 기간 정국의 불안정함을 방지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홍국영의 몰락은 이러한 정조의 교묘한 정치적 계산에 따른 희생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는 별개로 홍국영이 정치적 비대화에 따라 함부로 권력을 농단하고 자기 관리를 등한시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영조 시절의 세도가이자 자신의 최대 난적이었던 정후겸의 행보와도 별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 또한 그를 변명하는 일부 사가들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1780년 그가 실각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효의왕후 김씨 독살 미수사건은 사실 관계 여부를 떠나 왕후 김씨가

그의 득세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한데,

이 대목 역시 일부 사가들은 정조의 판단에 의한 계획적인 사건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실록에 기록된 홍국영의 당시 행적으로 보아 이 사건 역시 그의 그릇된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작용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강릉에 위리안치된 그는 이듬해인 1781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일부 야사에는 그가 홧병으로 얻은 등창에 의해 병사했다고 전해지는데,

홍국영이 갑작스러운 실각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아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조대왕과 정순왕후의 대결

 

정순왕후는 이산의 할머니다. 혈족으로는 아니지만 법적으로는 그러하다.

영조(1694~1776년)에게는 2명의 왕후와 4명의 후궁이 있었는데,

이산은 후궁 영빈 이씨의 손자이고,

정순왕후는 영조의 두 번째 왕후였다.

 

할머니가 손자와 대결한다는 것은,

유교적 가족질서를 국가질서의 이념적 기초로 삼았던 조선사회에서는 원칙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순왕후는 생애의 대부분을 이산과의 대결에 바친 인물이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부인으로서보다는 이산의 라이벌로 살았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순왕후는 법적으로는 이산의 할머니가 되지만, 나이로 보면 누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65세의 영조와 결혼한 1759년에 정순왕후는 14세였고 이산은 7세였다.

나이로 치면 7 살 연상의 누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이산과 같은 세대였던 정순왕후는

그야말로 일생을 다 바쳐 ‘세손 이산’과 ‘국왕 이산’을 공격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이산이 추구한 개혁정치는 결국 정순왕후를 비롯한 수구보수세력에 의해 송두리째 뽑혀버리고 말았다.

이산 측에 대한 정순왕후의 정치적 공격 가운데에서 몇 가지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 오빠 김귀주를 동원해 이산의 아버지를 궁지에 내몰다. 

정순왕후가 궁궐에 들어온 지 2년밖에 안 되는 1761년에 사도세자가 아버지 몰래 평안도를 다녀온 사건이 있었다.

사도세자의 평안도 여행은 반대파에 의해 ‘역모를 위한 사전답사’로까지 확대·재생산되어

결국 사도세자의 ‘죽음 여행’으로 이어지고 만다. 이산이 세손이 된 지 2년이 지난 때였다. 

처음에 나경언이란 인물이 이 일을 고변했을 당시에, 영조는 사건의 파장을 우려해서 세자의 평안도 여행을 극비에 부치도록 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가 영조에게 올린 밀봉 편지에서 이 일을 문제 삼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편지에서 김귀주는 사도세자의 장인인 좌의정 홍봉한을 포함해서 탕평파 전체를 공격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국왕의 측근세력인 탕평파 전체를 공격하는 내용의 편지였기에 그 파장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직 20살 전후밖에 안 된 ‘애숭이’ 김귀주가 오로지 누이동생만 믿고 벌인 일이라서

국왕 영조는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극비에 부치라고 명한 평안도 여행사건을 김귀주가 어떻게 알고 이렇게 공격적인 서한을 영조에게 올릴 수 있었을까?

정순왕후가 김귀주에게 그런 정보를 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의 사람들은 김귀주 등이 이산 측을 공격할 때마다 그 배후의 인물로 정순왕후를 지목했다고 한다.  

이처럼 정순왕후는 김귀주를 앞세워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에 가담했다. 그는 어린 세손 이산을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만든 것이다. 

 

2 ▲ 홍국영의 씨앗을 제거하려고 왕위계승문제에 개입하다. 

이산이 국왕에 등극한 이후 정순왕후는 홍국영에 대한 정치적 공격에 주력했다.

왜냐하면, 홍국영은 김귀주 세력을 압박하고 이산을 국왕으로 만든 킹메이커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산과 홍국영을 분리시킴과 동시에 홍국영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구사했다.

정순왕후는 홍국영의 씨앗을 제거하기 위해, 홍국영과 손을 잡은 은언군(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이산의 배 다른 동생)과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의 처단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 그는 홍국영의 누이인 원빈의 양자(상계군)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1780년 2월에는 “중전 효의왕후가 병 때문에 후사를 얻을 수 없으니 하루빨리 비빈을 간택하라”는 내용의 교서를 대신들에게 내려 국왕 이산을 불쾌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산의 부인인 효의왕후가 후사를 생산하지 못하자,

일각에서는 후궁인 원빈(홍국영의 누이)의 양자인 상계군(사도세자의 손자 : 정조의 조카)을 후사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럴 경우 홍국영 집안이 득세할 것이란 우려 때문에, 그는 다른 여자를 이산의 부인으로 삼기 위해 위와 같은 교서를 대신들에게 내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순왕후가 당사자인 이산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이 같은 교서를 대신들에게 내렸다는 점이다. 국왕의 동의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국왕의 결혼문제에 관한 지시를 내린 것이다.  

그는 이산과 홍국영을 분리시키려는 의도에서 또 홍국영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이처럼 국왕 이산의 권위에 흠집을 내곤 하였던 것이다. 홍국영을 옆에 두면 둘수록 국왕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가 이산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3 ▲ 은언군에 대한 공격으로 국왕 이산을 괴롭히다 

정순왕후는 이산 외에도 정종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이름은 인(裀). 사도세자의 서자로 어머니는 숙빈임씨(肅嬪林氏) : 후일 손자가 철종으로 왕위에 오른다)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이산과 은언군의 공통점은 둘 다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이산이 아끼는 은언군에 대한 대담한 공격은 국왕 이산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일이기도 했다.   

특히 은언군의 경우에는 그가 정순왕후의 숙적인 홍국영과 손을 잡았다는 점 때문에, 더욱 더 정순왕후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미 국왕으로 등극한 이산과 달리 은언군은 그저 힘없는 왕족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순왕후에게는 만만한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은언군의 신변을 놓고 국왕 이산과 정순왕후 사이에 길고 긴 신경전이 계속되었다.

정순왕후 측은 역적 혐의를 씌워 은언군을 사형으로 몰려고 했고,

이산은 격렬한 저지를 벌여 결국 강화도에 귀양 보내는 조건으로 그의 목숨을 살려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789년(정조 13)에 정조가 왕명을 내려 은언군을 한성으로 데려오도록 했지만, 정순왕후 측의 훼방으로 이 일은 실패하고 말았다.

은언군은 다시 강화도로 돌아갔다. 1794년(정조 18)에는 정조가 은언군을 데려오도록 가마를 보낸 일이 있었다.

이때 정순왕후는 이 일을 저지하라는 전교를 대신들에게 내리기도 했다.  

국왕인 자신보다도 정순왕후를 더 두려워하는 일부 대신들을 데리고 국정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던 이산의 고뇌가 어떠했을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은언군을 사이에 둔 이산과 정순왕후의 신경전은 이후에도 첨예하게 계속되었다.

혈육에 대한 의리가 남달랐던 이산은 은언군을 한강 근처로 불러내서 만난다든가,

경기감영으로 순찰을 가는 도중에 살짝 만난다든가, 아예 강화부로 찾아가서 만난다든가 하는 등등의 아이디어를 짜냈다.  

그때마다 정순왕후는 대궐 밖에 나가서 살겠다든가 아니면 밥을 안 먹겠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썽을 일으키곤 했다.

‘법적으로 할머니만 아니었다면!’ 국왕 이산은 그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은언군에 대한 공격으로 자신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정순왕후가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미웠을까? 

개혁정치를 완수하기 위해 친위부대 장용영까지 만들 정도로 비장했던 정조 이산.

그는 개혁의 최대 장애물인 정순왕후를 상대로는 이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다. 법적으로는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유교적 예법질서를 전제로 개혁을 추구해야만 했던 정조 이산의 한계라고 해야 할까?

 

4 ▲ 이산의 개혁정치를 송두리째 뿌리 뽑다. 

정순왕후는 이산보다 7년 먼저 태어났지만, 정조보다 5년 늦게 죽었다.

그래서 이산의 사후에 그의 개혁정치를 뿌리 뽑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48세의 나이에 갑자기 죽은 이산의 상여를 보면서 정순왕후는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정조 이산이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의 권력을 쥐고 정조가 이룩해 놓은 개혁정치의 기반을 파괴하는 데에 앞장섰다.

그의 개혁 파괴는 ‘이산의 사람들’에 대한 공격으로 집중되었다.  

 

이산의 재위 당시만 해도 천주교는 그저 사학(邪學)으로만 규정되었을 뿐 그 활동은 용인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반역집단으로 규정하고 이것을 명분으로 이가환·권철신·홍낙민 등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정약용을 유배시키는 등 남인세력을 일소하고자 했다.

천주교 소탕을 명분으로 정조의 인적 기반에 대한 숙청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은언군 집안은 물론이고 북학파 박제가를 포함해서,

이산의 보호 혹은 사랑을 받던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거나 유배시켰다.

또 이산의 친위군대인 장용영도 없애버렸다.

정조 이산의 개혁정치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는 인적 기반을 철저히 말살한 것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정순왕후의 행적 가운데에서 다른 일들은 단순한 정치투쟁으로 볼 수 있겠지만,
정조 이산의 사후에 그의 개혁정치를 송두리째 말살한 것은 단지 정치투쟁의 차원에만 그치는 게 아니었다. 

 

영조와 정조의 개혁은 임진왜란 이후로 꺼져 가던 조선을 살리기 위한 일종의 르네상스 개혁이었다.

이것은 같은 시기에 청나라에서 꽃핀 강희제-옹정제-건륭제의 르네상스에 비견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순왕후는 수구보수의 입장에 서서 정조 이산의 개혁을 송두리째 말살하는 정치적 행적을 남겼다.

조선왕조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불씨 중 하나를 없애버린 것이다.

정조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19세기에 조선왕조가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는 굳이 부언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정조 이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체제개혁의 기회를 상실한 조선은

이후 일본과 서양세력의 파상공세를 견디다 못해 결국 국권을 내주고 만다.

자신의 개혁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이산에게도 책임이 있겠지만,

조선을 살리기 위한 개혁을 끝내 무산시킨 정순왕후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지금 드라마 <이산>에서 세손 이산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정순왕후는 단지

이산의 정치적 숙적일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개혁 염원에 대한 적이기도 했다.

그는 정조 이산만 공격한 게 아니라 조선왕조의 르네상스 개혁까지 공격한 것이다.

 

------------------- 여기서 잠시 조선시대 왕의 독살설을 검토해봅니다 ------------

( 조선왕의 독살설 책자에 소개된 내용을 중점으로 발췌했음 )

5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왕조.이기간동안조선은27명의왕을 배출했는데 그중에는갑작스런 죽음에 휘말린왕들이 몇몇있다.

인종, 선조, 효종, 현종, 경종, 정조, 고종이그들이다.

여기에 살아있었다면 조선역사의 흐름까지도 바구었을지도 모를소현세자까지 포함해 모두 8명이 독살설에 휘말리고있다.

조선왕4명중1명이 독살설에 시달리고 있는셈이다.

과연누가 왜그들을죽였을까? 조선왕 독살사건은 이들의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의혹과 실체를 자세히보여준다.

특히 기존의 정사뿐만아니라 우리가 몰랐었던야사속에  나타난사실을 총정리 상상력을동원해 왕들의독살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해간다.

여기에 독살여부를 밝히는데 멈추지않고 왕의갑작스런죽음이 초래한  정치적파장역시흥미진진하게 그리고있다.

따라서 우리가이제껏잘몰랐던 왕들과관련된 흥미러운 얘기들 역시 다수등장한다.

이를통해우리역사의 숨겨진 이면을 아는재미역시 색다르다. 

이제는 말할수있는 추악한우리역사의 진실찾기, 때로는긴장하며,때로는분노하며 읽어야할 우리역사의 비밀.

책은총8장[인종,선조,소현세자,효종,현종,경종,정조,고종]편으로 각각1장씩구성]으로 구성돼있다.

여기에는때로,긴장하면서,때로분노하면서 읽어야할우리역사의치부들이 고스란히 담겨져잇다.

이에따라 어떻게 그럴수있엇을까?라는 단순한 의문부터

만일 소현세자가 살아잇엇다면 ,정조가 죽지않았다면 ......에이르기까지 독자의역사적상상력을 자극한다. 

또사진자료를 많이보여주는것도 좋다생각된다.  왕들의 죽음에는한가지공통점이있다.

한결같이 반대세력과 정치적긴장이 극대화되어잇을때 급서했다는점이다.

이를테면 정조의경우 그의정적이엇던 정순왕후가 임종을 지킨것 자체가 의심스럽다.

[여자는왕의 임종을지킬수없다는]조선의 법도를 무시하면서까지 그녀가 임종을 지킨데는 커다란 비밀이 담겨져있다

(정조실록에서도 정조를 최후로 대면한자가 정순왕후 이기에 정순왕후를 의심하는 기록이 나온다)

고종역시 마찬가지다. 

고종이 위독해지자 조선총독부에서는 친일파이완용과 이기용에게 숙직을 명햇다.

즉고종의 최후를 지켜본 두인물은 두친일파뿐니라는 사실이다.

이밖에도,인종,선조,소현세자,효종,현종,경종등 독살설에 휩쌓인 왕들의 최후순간을 되짚어보며

그속에깔린 음모와배신의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고있다.  반성없는 역사에 미래는없다.

조선에는 유난히독살설에 휘말린왕들이 많았다. 그이유를 허약한왕권에서 찾는다.

당론을 최우선시했던 신하들이 기득권을 지키기위해 자기와맞는왕을 고르기위해 독살을 택한것이다.

그러나 많은사람들은안타까와한다. 

만일그들이 살아있었다면 조선의역사 아니 대한민국의역사가 충분히 바뀔수도 잇기 때문이다.

이에책은[역사는 어둡고밝음을 떠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확히 밝혀져야한다.]주장한다. 

나아가 그속에서 가치를 끄집어내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라는것이다. 반성없는역사는 미래가없다.      

 미래가없는역사는 어디에쓰겟는가?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해 과거를 잠시봤을뿐이다. 

 

-----------------    결론 (화니의 생각)   ---------------------

정순왕후는 정적 정조(이산)와의 싸움에서

1차 싸움은 이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임에 이르게해서 이겼지만

2차 싸움에서는 이산에게 패하여 이산이 왕으로 즉위해 정조가 되었으며 이산의 심복인 홍국영등이 

1차 싸움과 2차 싸움의 정순왕후측을 얼마동안 궁지로 몰아 넣었지만 그 중심인 정순왕후를 어떤방법으로던

제거하지않고 그냥 둠으로서 정작 정조대왕이 사망한 이후에 결국 정순왕후를 최후의 승리자로 만들어 주었다.

 

현재 드라마에서 보듯이 역모인던 음모이던간에 미심적은 면이 있으면 모르되

확실하게 잘못한 점이 증명되었으면 그냥 둘것이 아니라

후사를 보아서 그싹을 완전히 도려내야 한다는 역사의 진리를 여기서도 보게된다.

 

드라마에서 처럼 정순왕후가 국본을 흔드는 커다란 잘못을 했다면 영조가 후일을 위해서 정순왕후를 내쳤어야만 했고,

영조가 차마 그렇게 하지못했다면  정적의 당사자이며 피해자인 정조가 즉위후 이전의 죄를 물어서

정순왕후를 대비에서 폐비하여 사가로 내보냈다면 후일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것이다

 

일부 사학자들이 정조가 독살을 당했다고 주장하는것은 정순왕후가 이산의 정적이면서도

내명부의 으뜸인 대비로써 은밀한 궁중의 내부를 자신의 마음대로 할수 있는 위치에 계속 있었기에

당연하게 나오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즉 정순왕후 이라면 이전부터의 정적관계로 있었기에  정조를 독살할 생각도 있었을것이고

자신의 수하를 시켜 얼마던지 독약을 누구에게던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수십년간 머물렀기에

정조대왕 독살설이 신빙성 있게 나오는것 이라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볼때 정순왕후는 정조가 사망한 이후에 어린 순조가 즉위함으로서

수렴청정하면서 십수년 동안 조선의 왕처럼 군림하는등 성공된 삶을 살았는지 모르나  

400년 이상 이끌어온 조선왕실을 다시 살리려는 영,정조의 노력이 얼마간의 효과가 있어

다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나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심에 모든 것을 허사로 만들었고

이는 조선 왕실을 허약하게 만들어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어리고 힘없는 왕이 계속 등극하게 되어서

이조왕실의 몰락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와중에 대원군 역시 이들의 눈치를 보느라 "상가집의 개"라는 소리를 들으며 숨죽이고 살아

결국 어린 고종을 왕으로 만들어 내는데 성공해서 허약해진 왕실을 일으키려했으나 역부족으로 사라졌다고 볼수있다 

이는 우리민족의 씻을수 없는 치욕인 한일합방으로 연결되기에

정순왕후는 우리민족 국가인 조선왕조가 없어지는데 커다란 일조를 했다고 할수 있다.

 

출처 : 화니의 야생화 향기
글쓴이 : 화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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